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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ure and Art

한국적 현대건축의 선구자, 건축가 김중업

by 하프시계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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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 건축가,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김중업 건축가

1922~1988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이한, 김중업 건축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중업 건축가는 르 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사회적 발언을 서슴없이 했는데, 이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김중업 건축가를 한국에서 추방합니다. 박정희가 사망하고 나서야 한국에 들어와서 다시 활동할 수 있었던 한국 1세대 건축가입니다. 한국의 건축을 예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에 기여를 했다.

 

1922.3.9.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파리건축대학 대학원을 나오고 르코르뷔제 밑에서 일한 한국 1세대 건축가로 미국 하버드대학원 건축대학원 교수, 1975년 미국 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 교수였다. 

 

 

"건축이란 인간이 자연에 시도하는 가장 웅장하고 보람 있는 창조에의 길이라는 것을 꼭 잊지 말아야 한다."

 

 

 

[Biography]

1922년 평양시 진향리에서 5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연안 김 씨 권세가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평양 고등 보통학교 출신으로 군수를 지내기도 하여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김중업도 평양고보를 다녔다. 김중업은 어렸을 때부터 시와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의 허락을 받을 수 없던 김중업은 대신 건축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1939년 일본의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김중업은 "미술과 시와 가장 가까운 것이 건축이었기 때문"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중업은 1941년 12월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42년부터 약 2년간 도쿄의 마쯔라 히라타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고 고전 건축에 근거를 둔 근대건축을 접했다. 21살 나이에 평양시 염 전리의 김병례와 중매로 결혼했다. 부부는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1944년 귀국하여 서울의 조선주택영단, 안양의 조선 비행기 공업 주식회사에서 일했다. 광복을 맞아 1945년 8월 18일 평양으로 돌아와 공산청년동맹 연구부장을 맡았다. 

 

1947년 당시 25세였던 김중업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로 재임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곳에서 당시 유명 예술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했다. 시인 구상. 모윤숙. 조병화, 화가 김환기. 박서보. 이중섭 등과 우정을 나눴다.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다]

1952년 7월 베네치아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제1회 세계 예술가 대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동경하던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게 된다. 김중업은 특별연사 자격으로 무대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에 르 코르뷔지에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 밤 르 코르뷔지에가 김중업에게 "당신은 시인인가요 건축가인가요?"라고 물었고, 김중업은 "저는 시인이자 건축가입니다."라고 말했고 파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1952년 10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3년 2개월 동안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김중업은 인도 펀자브주의 찬디가르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건축가는 시대를 지켜보는 목격자여야 하며, 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에서 강제 추방당하다]

1956년 한국으로 귀국하여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었다. 모더니즘과 한국 전통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업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부 시절, 국가정책 비판했다가 강제 추방되어 9년을 유랑했다. 중앙정보부가 그를 반체제 인사로 분류하여 1971년 강제 추방했다. 김중업건축연구소는 삼일빌딩 설계비조차 받지 못하고 세무조사를 받고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다. 

 

김중업의 자식들은 한국에 남겨둔 채 프랑스 파리에서 100km 떨어진 페르 앙 타르드누아라는 시골에서 부인과 둘이 살았다. 파리에 계속 머물 수 있던 건 유엔본부 건축위원이었던 르 코르뷔지에가 유엔본부에 제청하여 난민 지위를 받게 해 줬기 때문이다.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고 9년간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다. 그 후 한국에서 건축가로서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했다. 

 

 

참고자료 Press

 

[건축특징]

모더니즘과 한국 전통을 결합한 건축을 보여주었다. 한국에 건축되었던 김중업의 초기 건축물들을 보면, 건축물에 부드러운 곡선을 주로 쓴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필로티, 모듈러 등의 요소들) 본인만의 건축으로 풀어낸 것을 알 수 있다. 건축물을 보면 '조형적'이면서 그렇다고 딱딱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대표 작품]

1962. 주한 프랑스 대사관

1969. 제주대학교 본관

1967. 서병준 산부인과 의원

 

1982. 쇼핑센터 태양의 집

1983. 육군박물관

1987. 중소기업은행 본점

1988. KBS 국제방송센터와 세계평화의 문 (유작이 되었음)

 

 


주한 프랑스 대사관

1961년 당시 전경. 왼쪽이 관저 본관동, 오른쪽이 사무동.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위치: 서울 서대문 언덕
  • 면적: 1,603㎡
  • 규모: 지상 4층, 4개의 건물

 

4개의 건물이 경사진 대지 위에 둥근 정원을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다. 이런 배치는 한국 전통가옥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사무동 건물은 한국 전통 기와지붕의 날렵한 곡선을 적용했다. 이 건물에는 두 종류의 지붕이 등장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인도 찬디가르에 설계한 주지사 관저와 행정 청사의 형태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 지붕 형태를 한국 전통건축의 지붕선에서 가져와 이것을 현대적 재료로 재해석했다. 

 

 

 

[2022.05.23. 업데이트]

참고자료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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